동물

청개구리

살구나무꽃 2018. 8. 24. 18:19

 

 

청개구리

 

18. 08. 19     황금산

 

학명 Hyla japonica (Günther, 1859)
생물학적 분류  : 동물계(Animalia)
: 척삭동물문(Chordata)

: 양서강(Amphibia)
: 무미목(Anura)
: 청개구리과(Hylidae)
 : 청개구리속
식성 애벌레, 곤충, 거미, 다지류 같은 절지동물과 지렁이 등
서식지 낮은 산의 논밭, 하천, 산지 계곡
 
나무나 풀에 붙어 있을 때는 녹색이고, 나무에서 땅으로 떨어지면 잠시 후에 회갈색으로 변하고, 흑색의 무늬가 나타나기도 하기 때문에 다른 개구리로 오인하기 쉽다.
수컷은 턱밑에 큰 주름주머니가 있어서 비가 오기 전에 이 주머니에 공기를 넣어 큰 소리로 요란하게 운다.

기타정보 : 청개구리는 몸의 분비물에 독성이 있으므로 만지고 난 후 반드시 물에 손을 씻어야 한다. 만약에 손을 씻지 않고 청개구리를 만진 손으로 눈을 비빌 경우 실명하는 경우도 발생한다.

 

 

비오는 날 청개구리가 우는 진짜 이유는 무엇일까?

 

피부 호흡을 하는 개구리는 습기가 있어야 숨 쉬기가 편하다. 습한 공기가 몸에 닿으면 기분이 좋아서 힘차게 소리를 내는데, 그러다 보니 공기 중 습도에 아주 민감하다. 비가 올 즈음이면 습도가 높아지는데, 이를 감지한 개구리가 울음을 내는 것이다. 실제로 청개구리가 비가 올 것을 맞출 확률은 25% 정도라고 한다.

 

-. 청개구리와 방울고랭이

 

 

 

 

청개구리설화(靑─說話)

 

☆ 이칭별칭 : 청와전설(靑蛙傳說), 청개구리의 불효, 청개구리의 울음소리

 

☆ 정의 : 청개구리가 비가 올 때면 우는 이유를 설명한 설화.

 

☆ 내용 : 동물담(動物譚) 중 유래담(由來譚)에 속한다.

 옛날에 부모의 말이라면 덮어놓고 반대로만 하던 청개구리가 있었다.

어머니가 죽으면서 산에 묻히려고, 자식에게 반대로 냇가에 묻어달라고 하였다.

불효를 뉘우친 청개구리는 유언대로 냇가에 묻었다.

그 뒤 비가 올듯하면 무덤이 떠내려갈 것이 걱정되어 청개구리는 슬프게 울었다.

 

이 설화는 비가 오려고 할 때면 청개구리가 운다는 경험적 사실에 근거하여 이야기를 구성하고 있어서 기발한 예술적 착상이 두드러진다. 효(孝)를 주제로 하는 이 설화를 바탕으로, 말 안 듣는 아이를 ‘청개구리 같다.’라고 하는 관습적 비유가 이루어진 것을 보면, 이 설화는 우리 민족에게 깊은 뿌리를 내리고 있다 하겠다.

 

중국 당나라 이석(李石)의 『속박물지(續博物志)』 권9, 은성식(殷成式)의 『유양잡조속집(酉陽雜俎續集)』 권4, 10세기말 송나라 때에 나온 『태평광기(太平廣記)』 권39 등에 실려 있다. 우리나라의 여러 지역에서 구전되고 있다.

 

 

 

양평 떠드렁섬의 청개구리설화

 

-. 양평 떠드렁산

 

李适(이괄)

 

1587년(선조 20) ~ 1624년(인조 2) 2월 14일

조선 중기의 무신. 인조반정으로 반정공신이 되었다가 이괄의 난을 일으킨 군인.

본관은 고성(固城)[1], 자는 백규(白圭).

붕당의 역사에서는 북인을 몰락시키고 서인들이 집권하는 계기를 마련한 인물이기도 하다.

북인은 광해군 퇴출과 이괄의 난으로 쓸려나간다.

 

이야기는 조선중기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이괄의 난'으로 유명한 무신(武臣) 이괄(1587~1624)은 어려서부터 말썽꾸러기여서 아버지가 시키는 일는 무엇이든지 다 반대로 하였다고 합니다.

 

양평 떠드렁섬의 청개구리설화

 

이괄의 아버지는 평소 풍수지리에 관심이 많아 일찍부터 묘자리를 알아보고자 전국 팔도강산을 누비다가 용문산의 정기가 침차게 뻗어 강가에 함빡 기가 모여 있는 이곳, 떠드렁산을 찾았고 죽음을 앞두고는 이괄에게 자신을 떠드렁산 바위 밑에 묻어달라 하였습니다.

이때 이괄의 아버지는 이괄이 또 반대로 할 줄 알고 "내가 죽거든 거꾸로 묻지 말고 바로 묻어다오."라고 말하고 죽었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이괄의 아버지가 원래 반은 용(龍)이고 반은 사람이라 거꾸로 묻어야만 죽은 후에 용으로 승천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청개구리 이야기처럼 이괄 역시 아버지의 유언을 이길 수 없다며 바로 묻어드려 결국 아버지는 용으로 승천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이 때문에 훗날 이괄의 난이 결국 실패했다고 합니다.

 

 

이괄의 난

 

이괄은 조선의 제15대 임금인 광해군 때부터 인조 때까지 무신으로 활동했다.

그는 서인 세력이 1623년에 광해군을 임금의 자리에서 쫓아내고 인조를 새로운 임금으로 세우는 데 큰 공을 세웠다.

하지만 그는 인조반정 후 권력을 잡은 사람들과 사이가 나빠 공을 세우고도 좋은 대접을 받지 못했다.

 

그러던 중 이괄은 후금이 북쪽의 국경을 위협해 국방 문제가 심각해지자 평안북도 병마절도사로 가게 되었다.

그런데 1624년에 문회와 허통 등이 이괄과 그의 아들이 역모(나라를 배반하거나 왕의 권력을 빼앗는 일)를 꾸몄다고 고발했다. 이에 이괄과 관련된 사람들이 잡혀가 고문을 당하며 조사를 받았지만 역모의 증거는 나오지 않았다.

나중에는 이괄의 아들까지 한양으로 불러들여 조사하려고 하자 이괄은 반란을 일으켰다.

 

이괄은 군사들을 이끌고 내려와 한양을 점령했다.

그러고는 선조의 아들인 흥안군을 새 임금으로 내세웠다.

하지만 이괄은 그를 배신한 부하 장수들에게 죽임을 당했고, 장만이 이끄는 토벌군에 의해 반군도 진압당하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