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유릉의 여름
홍유릉의 여름
21. 08. 20
홍릉은 조선시대 말기에 조성된 능역으로, 고종이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황제의 자리에 올랐기 때문에 황제릉의 양식을 따라 명나라 태조의 효릉을 본떠 조영하였다.
능침의 삼계를 없애고 석물을 배전의 앞으로 배치하고, 정자각 대신 일자형 건물의 배전을 세웠다.
능침 주위에 배치되었던 석수들은 배전 앞, 참도의 좌우에 그 종류를 더하여 나란히 세워져 있다.
조선 제26대 왕 고종(高宗 1852~1919, 재위 1863∼1907)과 비 명성황후(明成皇后) 민씨(1851~1895)를 합장한 무덤이다. 순종과 순명효황후, 순정효황후의 무덤인 유릉(裕陵)과 함께 1970년 5월 26일 사적 제207호로 지정되었다.
1895년 8월 20일 경복궁 곤녕전에서 시해된 명성황후는 1897년 11월 21일 서울 청량리(홍릉수목원)에 묻혔다.
고종은 1919년 1월 21일 덕수궁 함녕전에서 숨져 3월 4일 현 위치에 예장되었고,
그때 명성황후의 능이 풍수지리상 불길하다는 이유로 이장되어 고종의 능에 합장되었다.
고종이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황제의 자리에 올랐기 때문에 홍릉은 황제릉의 양식을 따라 명나라 태조의 효릉(孝陵)을 본떠 조성되었다. 꽃무늬를 새긴 12면의 병풍석으로 봉분을 둘렀으며, 봉분 밖으로 역시 꽃무늬를 새긴 12칸의 난간석을 설치하였다. 혼유석·망주석·사각 장명등의 석물을 배치하였고, 봉분 밖으로 3면의 나지막한 담을 둘렀다. 대부분의 조선 왕릉에 설치한 석양(石羊)과 석호(石虎)는 없다.
능이 조성된 언덕 아래쪽에는 정자각 대신 정면 5칸·측면 4칸의 일자형 침전(寢殿)을 세웠다. 침전 앞의 참도(參道) 양 옆으로 문인석·무인석과 기린·코끼리·사자·해태·낙타·말의 동물 석상을 차례로 배치하였으며, 장대한 크기의 문·무인석은 금관을 쓴 전통적 기법으로 조각되었다. 침전 외의 부속건축물로 비각·홍살문·수복방·재실 등이 있다.
<홍릉>
<유릉>
<홍릉 연지>
연지가 수련으로 가득하다.
아직 꽃대는 많이 올라오지 않았다.
<개오동>
<노린재나무>
줄기가 꽤 굵다.
어른 팔뚝만하다.
<능수벚나무와 독일가문비나무>
조선왕조 다른 능들에 비해 수입종 나무들이 많이 있다.
<오리나무 숲>
예전에 이정표가 없던 시절
길손들의 안내를 위해 5리마다 심었다고 해서 오리나무라는 말이 있는데
그렇지 않다는 설도 있다.
여기서 오리라는 의미는 19세기 초에 정립된 거리 단위의 오리가 아니라
고대사회부터 이미 우리 생활에 친근하게 밀착된 나무이기에
아주 오랜 고대사회부터 매우 신성감을 지니고 있는 ‘오리’라는 언어,
즉, 사람의 얼굴과 얼을 의미하며 매우 중요한 정신세계의 언어인 ‘오리’를
이 나무에 붙여 ‘오리나무’라 전해 왔을 것이라는 주장이다.
오리나무는 저습지 극상림의 주인공으로 천이 마지막 단계의 종으로서
농경문화가 태동했던 시대에 사람의 터전이라 할 수 있는 저습지,
즉 논과 밭이 가능하고 야생 철새인 오리의 서식처가 되기도 했던
저습지의 잠재자연식생 주인공으로서 존재했기에
선사 농경문화와 그 인연이 길고 깊으며 정착 농경문화가 생기기도 전에
이 나무는 인류에게 신성목(神聖木) 같은 존재였을 것이다.
오리는 알(생명)을 낳는 새(乙, 을)를 대표하는 동물이며,
고대 사회에서 하늘, 인간, 땅을 이어주는 신성한 매개 생명체로서
하늘과 땅의 소식을 전하는 신비롭고 성스런 매개체로 받아들여
‘솟대’ 위에 세워 신성의 생명체를 상징하는 푯대로 삼았다.
1~2세기 삼한시대 창원지역에서 출토된 오리 머리 모양의 토기가 많은 것은
그 당시 정착 인류에게 ‘오리’는 매우 존귀한 조류이었으며
‘오리’라는 언어 자체가 신비성을 지녔으리라는 것이다.
따라서 오리나무의 오리는 새(鳥類) 오리이고,
인간의 정신세계(얼)와의 인연이 있는 명칭이지
거리의 단위로 5리라는 특정 값과 그에 대응하는 특정 나무를
오리나무로 선정해 사용했다는 것은
오리나무란 이름 자체가 20세기 초에 생겨난 이름이라는 것이며
설령 5리마다 표식으로 심은 일이 있었다 하더라도,
그 때문에 오리나무라는 이름이 생겨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전통 결혼식에서도 오리를 앞세워 신랑 신부가 들어오고
오리 앞에서 신랑 신부가 맞절하는 등
오리가 상징하는 옛 전통문화와 연관 지어 보면
왕릉의 오리나무 소 군락은 단순하게 자라는 오리나무가 아니라
묘역 조성 시부터 대대로 생을 이어온 오리나무 숲으로서
또 다른 의미를 찾아볼 수 있을 것이라고 한다.
<좀작살나무>
<주엽나무>
<참빗살나무>
노박덩굴과
어린순을 나물로 식용하며, 잔가지와 잎을 약재로 사용한다. 지팡이 ·바구니의 재료로도 이용한다.
이름은 옛날에 참빗의 살을 만들었던 나무라서 참빗살나무라고 부른다.
노랑배허리놀린재가 많이 서식하고 있다.
<향나무>
<향나무 가지틈에서 자라고 있는 벚나무>
식물이 자신이 살아갈 자리를 잡는 것의 나무의 뜻이 아니다.
씨앗이 바람이나 동물들에 의해 옮겨지 자리에서 자랄 뿐이다.
아무턴 자리를 잘못 잡은듯하다.
<노랑배허리노린재>
참빗살나무에 서식하고 있다.
<팥중이>
<흰뺨검둥오리>
새끼들은 천방지축 먹이를 구하러 다니는데
어미는 경계를 서느라 주변을 살피며 두리번 거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