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경 및 일반

사릉(思陵)

살구나무꽃 2014. 4. 17. 21:21

 

사릉(思陵)

 

 

 

 

 

 

 

 

  • 정순왕후(定順王后) 송씨(1440년 ~ 1521년)
  • 능호 : 사릉(思陵)
  • 위치 : 경기도 남양주시 진건읍 사릉로 180
  • 지정번호 : 사적 제209호
  • 조성시기 : 1521년(중종 16)
  •  

    <능의구성>

    사릉(思陵)은 조선 제6대 단종(端宗)의 비 정순왕후(定順王后)의 능이며 단릉 형식이다.

    처음에는 단종의 누이인 경혜공주(敬惠公主)가 출가한 해주 정씨 묘역이었던 경기도 남양주시 진건읍 사능리에

    민간 신분의 묘로 조성되었다.

    그 후 중종 때 대군 부인의 예로 복위되고, 숙종 때(1698년) 왕후의 능으로 추봉되었기 때문에

    다른 능에 비하여 단출하면서 간소하다.

    능침의 규모는 매우 작고, 병풍석 난간석을 설치하지 않았으며, 문석인과 석마만이 자리 잡고 있다.

    양석과 호석도 한 쌍 씩으로 간소화되어 있다.

     

    사릉의 정자각은 맞배지붕으로 되었으며 배위가 짧기 때문에

    전체 건물의 모습이 정(丁)자형 보다는 정사각형의 느낌을 준다.

    정자각으로 연결되는 신도 및 어도가 동계와 연결되지 않고 끊어져있다.

    사릉은 문화재청이 관할하는 궁과 능에 필요한 나무를 기르는 양묘사업소 묘포장이 있어서

    많은 전통 수종의 식물들을 볼 수 있는 곳이다.

     

    <능의역사>

    정순왕후는 1521년(중종 16) 6월 4일 소생 없이 승하하였다.

    중종은 단종부터 7대에 걸친 왕대를 산 정순왕후를 대군부인의 예로 장례를 치렀다.

    정순왕후는 후사가 없었으므로 경기도 양주 남쪽 군장리에 있는 단종의 누이 경혜공주의 시가인

    해주 정씨의 가족 묘역에 안장하고 제사를 지내주었다.

    1698년(숙종 24) 11월 6일 숙종에 의해 노산군이 단종대왕으로 복위되자

    부인도 정순왕후로 복위되었으며, 신위는 창경궁에 모셔져 있다가 종묘에 안치되었다.

    평생 단종을 생각하며 일생을 보냈다 하여 능호를 사릉(思陵)이라고 붙였다.

    그 후 1986년부터 사릉이 일반에 공개되었다.

     

    <동정곡과 동망봉>
    정순왕후는 15세에 왕비가 되어 18세에 단종과 이별하고 부인으로 강등되어

    평생을 혼자 살아가야 했던 불운한 인물이었다.

    단종이 수양대군에 의해 왕위에서 쫓겨나고 복위사건으로 영월로 유배된 후 사사(賜死)되자,

    정순왕후는 살고 있던 동대문 밖 산에 올라 아침저녁으로 유배지인 동쪽을 보며 통곡을 했는데,

    곡소리가 산 아랫마을까지 들려 온 마을 여인들이 땅을 한번 치는 동정곡을 했다고 전한다.

    그 뒤부터 이 산의 봉우리는 왕비가 동쪽을 바라보며 단종의 명복을 빌었다고 하여 동망봉이란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다.

    한편, 『한경지략』에 의하면 영도교 부근 부녀자들만 드나드는 금남의 채소시장이 있었다고 한다.

    이는 왕비를 동정한 부녀자들이 끼니 때 마다 왕비에게 채소를 가져다주다가 궁에서 말리자

    왕비가 거처하는 곳에서 멀지 않은 곳에 시장을 열어 주변을 혼잡하게 하고,

    계속해서 몰래 왕비에게 채소를 전해주려는 여인들의 꾀에서 비롯되었다고 하는 일화가 전해진다.


    어린 나이에 과부가 된 정순왕후는 힘든 생활 속에서도 세조가 내린 집과 식량을 끝끝내 받지 않았고,

    초가집을 짓고 평생 흰옷만 입었으며 고기와 생선은 먹지 않을 정도로 청빈하게 살았다.

    죽어서는 여인네들의 한을 달래는 토속신으로 숭배되기도 했다.

     

     

    <참고>

    양묘사업장이 있어 각종 나무와 야생화를 재배하고 있다.

    올해부터 입장료가 1000원. 주차비 없음

     

     

     

    <발길마다 묻어나는 정순왕후의 눈물>

     

    2014-04-22  동아일보

     

    종로구 숭인-창신동 일대

     

    정순왕후 송씨가 아침저녁으로 올라 단종의 명복을 빌며 통곡했다는 동망봉(東望峰)에 세운 동망정(東望亭).

    오른쪽은 정순왕후가 단종과 이별한 후 살았던 정업원 옛터. 종로구 제공

     

    조선왕조 500년 역사에서 가장 비극적인 왕을 고르라면 대부분 단종(1441∼1457)을 꼽는다. 그는 짧은 생애를 마쳤지만 단종 비 정순왕후 송씨는 가슴에 한을 품은 채 64년을 더 살았다. 그녀의 처절한 삶의 흔적은 서울 종로구 숭인동, 창신동 일대에 고스란히 남아 있다.정순왕후는 1454년 열네 살 때 왕비로 책봉됐지만 영광의 순간은 짧았다. 남편 단종은 이듬해 상왕으로 밀려났고, 1457년 사육신의 단종 복위 운동이 발각되면서 노산군으로 강등돼 강원도 영월로 유배됐다.단종과 정순왕후가 마지막 인사를 나눈 곳은 숭인동과 중구 황학동을 잇는 청계천 다리인 ‘영도교(永渡橋)’다. 그들의 마지막 만남을 지켜본 백성들이 훗날 ‘영 이별다리’ 또는 ‘영영 건넌 다리’라고 불렀다. 지금의 영도교는 청계천 복원 때 현대식으로 다시 놓은 것이다.궁궐에서 쫓겨난 왕후는 왕실의 도움을 거부하고 시녀 세 명과 함께 ‘정업원’이라 이름 지은 작은 초가집에서 생활했다. 현재 숭인동 청룡사 옆에 ‘정업원구기(淨業院舊基)’라고 적힌 비석이 남아 있다.유배를 떠난 남편은 얼마 지나지 않아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 왕후는 아침저녁으로 소복을 입고 동쪽에 있는 산봉우리에 올라 영월을 향해 통곡했다. 이 언덕을 ‘동망봉(東望峰)’이라 부른다. 청룡사에서 10분 정도 거리다. 여인의 한 맺힌 울음은 도성 주변을 뒤덮었다. 마을 여인네들도 왕후와 같은 심정으로 땅을 치고 가슴을 치는 ‘동정곡(同情哭)’을 했다고 전한다.슬픔보다 지독한 현실이 엄습했다. 한때는 왕후였지만 이제는 끼니 걱정을 해야 할 처지가 됐다. 왕후와 시녀들은 옷감에 물들이는 일로 생계를 이었다. 동망산 계곡 곳곳에는 자줏빛을 띠는 풀이 많았다. 옷감을 화강암 바위 밑에서 흘러나오는 샘물에 빨아 물들인 뒤 그곳 바위들에 널어 말렸다. 청룡사에서 북쪽 기슭으로 300여 m 떨어진 원각사 옆 화강암 바위 밑에는 지금도 샘물 솟는 우물이 남아 있으며 자지동천(紫芝洞泉)이란 글자가 새겨져 있다.왕후의 처지를 안타깝게 여긴 부녀자들이 채소를 가져다주자 조정은 이를 금지시켰다. 여인네들은 오히려 여인들만 출입할 수 있는 금남의 장소인 ‘여인시장’을 만들었다. 채소를 파는 척 모여든 뒤 왕후에게 가져다 준 것이다. 동망봉 남쪽 동묘 건너편 숭신초등학교 앞에 ‘여인시장터’라는 표석이 세워져 있다.

     

    22일 오후 3시에는 숭인근린공원에서 ‘제7회 단종비 정순왕후 추모문화제’가 열린다. 세월호 침몰 사고와 관련한 애도 분위기에 맞춰 추모제향만 경건하게 진행할 예정이다.숭인동 골목길 관광코스를 이용하면 왕후의 아픈 삶을 되짚어 볼 수 있다. 영도교→여인시장터→동묘→풍물거리시장→낙산묘각사→동망정→정업원 터 및 청룡사→자주동샘 및 비우당을 잇는 2시간 코스.

    종로구 홈페이지(jongno.go.kr)에서 최소 3일 전에 신청하면 된다. 02-2148-1855

    김재영 기자 redfoot@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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